식스티세컨즈가 전하는 이야기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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제목

가난을 다루는 방법, 유잎새

작성일 2021-06-02

내용

스스로 그어둔 선 넘어에서 온전한 취향을 발견해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?

각자 다른 삶만큼, 취향을 대하는 태도도 그것에 도달해 가는 과정도 다양할 수 있어요.


이번에 소개해드리는 이야기는 스페어룸 유잎새님의 글입니다.






가난을 다루는 방법

우리 집 가난은 대대로 물려온 때 묻은 장롱처럼 날 때부터 그 자리에 익숙하게 있었다. 안방 구석에 자리 잡은, 나보다 오래된 그것에 가족들 이불을 넣었다 꺼내며 세월이 갔다. 손 때가 묻을수록 존재감이 흐려져 장롱이 차지한 공간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. 삐그덕거리며 위태롭게 열리는 문을 이제와 수리할 수도 없으니 무심히 다시 닫을 뿐이었다.


때 묻은 장롱 옆에서 자란 아이는 생활비와 활동의 범위를 자연스럽게 익히며 컸다. 장롱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만 바라고, 장롱을 기준으로 세상사를 판단했다. 장롱보다 크면 비싸고, 장롱만 하면 부담스럽고, 장롱보다 작은 것들을 손에 쥘 수 있었다. 세상에는 우리 집 장롱보다 큰 것들이 많다고 했다. 그것들은 비싼 만큼 질과 맛이 좋다고 했다. 그렇지만 어차피 손에 넣지 못할 걸 알아서 무엇할까. 저것은 신 포도가 아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달고 탐스러운 포도라는 걸 알지만, 그 꿀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. 행여 그 단내의 근처에라도 갈까 걸음을 조심했다. 장롱보다 큰 것을 원하게 될 마음이 두려워, 욕구의 방향에 단단히 빗장을 걸었다.






선호와 아직 연애를 하던 시절, 봄이 한창인 그 날은 유독 날씨가 좋아 걸음이 가벼웠다. 시청에서 걷기 시작한 우리는 충정로를 지나, 아현역 앞에 닿았다. 그대로 이대와 신촌까지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. 아현역 앞은 가구단지가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. 선호가 갑자기 한 가게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. "어, 저기 템퍼 판다! 잎새, 템퍼 누워본 적 없다고 했지? 한 번 누워볼래?" 그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. "아, 나는 싫어. 템퍼 맛을 보고 싶지 않아."


당연히 좋을 걸 알기에 탐하게 될 내가 두려운 대답이었다. 선호와 그 뒤로 저 날의 풍경을 여러 번 곱씹었다. 우리가 가난을 다루며 살아온 방법이 달라 재밌었다. 나와는 결이 다르지만, 역시나 넉넉함을 모르고 자란 선호는 좋다는 것을 최대한 보고 탐하면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키웠다. 언젠가 돈이 생기면 그 수많은 체크리스트들을 하나하나 지워가겠다 결심했다.






나는 선호와 정반대의 방법을 선택했다. 비싸고 좋다는 것들은 최대한 모른 체 살려고 했다. 특히 물건에 대해서는 물욕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가지고 싶은 게 없는 상태를 유지했다. 일부러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, 모른 체 살려하니 자연스레 욕구도 사라졌다. 대신 내가 지불할 수 있는 한도 내의 콘텐츠를 부지런히 탐했다. 책과 영화는 우리 집 장롱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영역이었다. 만 원을 내면 300쪽의 글을 살 수 있는 게 기뻤다. 두껍고 끝나지 않는 이야기일수록 좋은 책이 되었다.


그러던 내가 물욕 많은 선호를 만나 둘이 모은 쌈짓돈으로 세상의 좋다는 것들을 하나하나 겪어보기 시작했다. 백화점에서 토퍼 위에 처음 누워본 날, 내가 푹 꺼지는 침구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. 그래서 놀랐다. 비싸고 좋다는 것들을 미리 경험해 봤으면, 비싸지만 나에게는 좋지 않다는 걸 진작 알았을 텐데. 탐할 것이 두려워 겪어보지 않은 수많은 선택지들이 어리석게 느껴졌다.


얼마 전에는 한 끼에 20만 원짜리 스시 오마카세를 먹어봤다. 3명이 갔으니 한 끼에 60만 원을 쓰는 자리였다. 회식이나 잔치가 아닌 개인적인 만남에서 써 본 가장 큰돈이었다. 첫 입부터 마지막 앵콜까지 장인이 손으로 쥐어주는 스시를 먹고 나니 내 안에 어떤 기준이 생겼다.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, 어떤 음식을 고를 것인지, 분위기와 맛 중 나는 어느 쪽을 중시하는 사람인지. 그 뒤에 하는 모든 외식은 20만 원짜리 오마카세를 기준으로 결정되어 대체로 싸게 느껴졌다. 사람의 품이 드는 영역에 가성비를 따지지 않게 되었다.






그리고 며칠 전, 우리 집에 새 매트리스와 토퍼가 도착했다. 식스티세컨즈의 라운지에서 토퍼 위에 누워본 날, 어, 하고 등이 붙어 일어나지를 못 했다. 토퍼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발견이었다. 새 침구가 배송된 첫날, 몇 년 사이 가장 아득한 잠을 잤다. 이제 나는 푹신한 매트리스는 좋아하지 않지만, 단단한 매트리스 위에 올린 라텍스 토퍼는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.






가난이 좁혀놓은 내 취향에서 하나하나 새로운 발견을 더해간다. 나는 물욕이 없는 사람이야. 나는 가지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이야. 내가 나에 대해 정의했던 그 말이 정말 진실일까? 가질 수 없어서 가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가질 수 있게 되었을 때도 여전할까?






때 묻은 장롱 밖의 세상을 조심조심 걸어본다. '싸다'와 '비싸다'로만 구분 지었던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본다. '비싸다'의 정의를 다시 내려본다. 비싸서 좋은 것과 비싸도 내 취향이 아닌 것, 여전히 싸지만 좋은 것과 싸니까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. 두려워하지만 않으면, 세상의 수없이 많은 층위 안에 내가 편안히 느낄 영역이 있다는 걸 배웠다. 두려워하지 않을 것. 전제는 그 하나뿐이다.






유잎새 @ip.sae
spareroom 스페어룸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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